실크로드(천산북로)의 언덕을 넘다
김전(시인)
국립 대구 박물관회(회장 조영길)에서 주관하는 실크로드 답사가 금년엔 천산북로 코스로 국내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코스다.
개척자의 정신으로 자부심을 갖고 10월 1일 11시 30분 대구에서 인천으로 향하였다.
상기된 얼굴로 40여명의 답사대를 실은 전용버스가 주차장을 벗어날 때, 이미 마음은 공중을 나르고 있었다.
인천공향에서 수속을 마치고 우루무치행 대한항공 KE883에 탑승하게 됐고, 5시간의 비행을 한 뒤 새벽 1시가 다 돼서 우루무치 야마호텔(野馬酒店)에 도착했는데, 그 특이한 구조는 중국풍과는 또 다른 멋을 풍겼다. 이 호텔은 국제 세미나 등 국제회의가 자주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내일 아침에 이 호텔 주변을 관람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이 호텔 사장이 꾸며 놓은 생태공원을 둘러 봤는데, 진귀한 것이 너무 많아 개인이 이런 것을 소장할 수 있을까? 의문이 갔다. 호텔 로비를 장식하고 있는 희귀한 옥돌이 여러 개의 장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이렇게 진귀한 색깔과 모양의 옥돌들을 어디서 수집했을까! 이걸 돈으로 따지면 계산이 안 될 정도의 가치란다. 뒤를 돌아 가 보니, 그 분이 조성해 놓은 생태공원에는 정말 놀랄만한 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쭉쭉 뻗은 나무와 길게 드러누운 나무, 모두가 '잎이 없으니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만져보니 딱딱한 돌이다. 그게 바로 나무 화석이란다.
정말 놀랄 일이다. 어찌 그 큰 나무가 통째로 돌이 될까? 가짜를 잘 만드는 나라니 가짜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진짜 나무 화석이란다.
그 외도 종마를 훈련하는 장면과, 기묘한 옥돌들을 모아 꾸며 놓은 여러 형태의 돌과 나무 들이, 넓고 넓은 대지에 펼쳐져 있었으며, 이게 개인 소유라니! 처음부터 주눅이 들었다.
호텔을 출발한 우리의 전용차는 중국에서 가이드(김정길)와 현지 도우미, 기사 등의 3명이 추가돼 46명이 된 답사대는 보부도 당당하게 스텝로드의 첫 발을 내 딛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오채성(五彩城)을 거쳐 치타이(寄台)로 가는 여정이다.
오채만 (오채성 내의 풍경구)은 수십만 년의 지각운동으로 지표면에 올라온 석탄의 자연 연소로 오색 단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란다.
우루무치를 출발해서 5시간을 달려 오채성에 도착했다. 차창 밖에 펼쳐진 광경은 우리의 기대와는 딴 판인 누릇누릇 드문드문 작달막한 풀들이 모질게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장면이다. 양떼도 보이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들판엔 가끔씩 돋아난 누리끼리한 풀 뿐이니 대원들의 실망이 컸다.
이렇게 건조한 땅에 목숨 붙이고 사는 풀은 어떤 풀일까 생각하고 가까이 가 보니 잎이 통통한 선인장과의 식물과 잎이 온통 가시로 덮혀있는 앙상한 풀이었다.
오채만 입구에선 경계가 삼엄하게 검열을 했고, 단체 비자도 점검했으며, 입장료도 당연 지불했다. 오늘 일정의 목표인 이 성엔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돌산이 드문드문 기묘한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 색채가 특이했다. 이름 같이 5색이 분명한 건 아니지만 누리끼리한 색깔과 흰 색깔, 검은 색에 가까운 짙푸른색은 구분이 됐다.
흰 흙, 붉은 흙, 거무스름한 흙은 우리 고향에도 있는 색이지만 그것이 돌로 굳어진 것은 보지 못했다. 여기서는 겨자 색깔의 누런색과 우리 고향의 황토색인 붉은색이 흰색, 검은 색과 섞여서 거대한 바위산을 이루었고, 온통 노란 빛깔로만 이루어진 돌산, 붉은색으로만 이루어진 돌산들이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모양으로 옹기종기 모여 거대한 성을 이루고, 우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산의 색깔도 이렇게 다양할 수 있을까? 모두들 셔터를 눌러대며 감탄했다.
오늘은 차를 타고 누리끼리한 들판만 지루하게 보다가, 잠깐 오채만에 들린 지루한 여정이었다. 오전 오후 합해서 10시간 정도를 버스에 앉아서 누르스름한 들판만 본 것이다.
치타이에 도착해서 화동호텔(華東酒店)에서 눈을 붙였다.
실크로드는 한나라 때부터 이루어졌는데, 잦은 전쟁으로 전쟁에 패한 도망자들이 초원으로 이동해 살기 시작했는데, 그게 흉노족이다.
한나라 인구는 1500만 정도였고, 한 고조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그래서 무제는 장건을 시켜 흉노족에게 밀려난 '대월씨'를 찾아가 동맹을 요청하려했는데, 장건은 흉노의 포로가 되고 만다. 장건은 천신만고 끝에 진영을 탈출해 돌아와서는 한무제에게 초원의 지형과 사정을 자세히 알려줌으로, 무제가 흉노족을 초원에서 몰아내는데 공을 세웠다. 또 당나라에게 쫓겨난 돌궐족도 초원을 거쳐 유럽으로 흘러들어간 계기가 됐다. 그들은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초원지대를 감싸고 있는 '천산 산맥'은 250Km가 된다. 또 곤륜산맥은 세계에서 제일 폭과 규모가 큰 산맥으로 해발 8000m 이상의 봉우리가 16개이며 이곳은 목화 생산이 166만 평방킬로미터라(남한의 16배) 하며 이곳에는 위그루족이 많이 살고 있는데, 청나라 때부터 이 부족을 위그루족이라 불렀단다.
식당 곳곳에서 청진(淸眞)이라는 표시를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무슬림의 표시이며, 마호메트가 초승달이 떴을 때 신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꼭대기에 초승달 모양의 로고를 매달아 두었다.
치타이 호텔에서 8시40분에 출발하려던 차가 식당의 늦장 준비와 유료물품을 무료인 척 비치한 속임수에 몇 명이 유로 생수를 먹고 18원(우리돈 3300원정도)의 고가를 치르게 됐고, 갖가지 용품들을 호기심으로 풀어보다 고가의 댓가를 치렀다.
요즈음 중국은 전과 달리 많이 팍팍해 졌다. 이전에 보편적으로 주던 무료 생수도, 면도기도 없다. 여기가 물이 부족한 곳이라 물은 그렇다 치고, 일회용 면도기도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9시에 출발한 차는 오후4시가 다 되어 바리쿤(巴里坤)초원에 도착해, 간단한 면으로 점심을 먹을 때까지 7시간의 비포장도로인 초원의 길을 달렸다.
여기에 오기 전 푸른 초원이 깔려있는 아름다움을 상상하던 대원들은 실망이 컸다. 계절적으로도 푸른빛이 시들 때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애초에 푸른 초원은 없었다. 땅에 붙은 앙칼지고 모진 풀들이 겨우 버티고 있는 정도라, 초원이라고 말하기엔 한참 격이 떨어졌다.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는 60년대 초등학교 때 보아온 광경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양떼의 풀 뜯는 모습과 당나귀, 말, 낙타 등이 한 번씩 출현해 그나마의 단조로움을 풀어 주었다.
멀리 설산이 보이기에, 그걸 차 안에서 카메라로 잡으려니, 뿌옇게 흐린 하늘 때문에 사진조차도 잘 되지 않았다.
어제에 이어 한번 차를 타면 5-6시간이 걸려 잠깐 내려 점심 먹고, 또 차를 타고 숙소로 갔다. 특히 오늘은 별로 본 것도 없이 잠깐 내려 점심만 먹고, 멀고 먼 길을 달려간 것이다.
옛날 이 길을 오갔던 상인들이나 스님들은 도보로, 또는 낙타타고 이 먼 길을 지났다니, 감탄해 마지않는다.
몇 시간을 가도 인가가 없으니, 화장실은 자연적으로 자연에서 주는 화장실을 이용했다. 바리쿤 초원을 돌고 있는 여정 중에 과일과 간단한 먹거리 파는 가게를 만나 너무 반가워서, 잠간 쉬면서 과일과 옥수수, 해바라기 씨 등을 사서 먹으며 지루함을 달랬다.
오후 4시에 점심 먹고 5시에 출발해서 하미(哈密)까지 오는데, 9시가 넘어 도착했으니, 10시간을 훨씬 넘기며 버스에서 단조로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는 꽤 괜찮은 식당에서 요리를 먹게 되어 부실한 점심식사가 좀 만회가 됐다.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피로감이 몰려 왔다
눈을 뜨자 말자 식사를 하고, 9시에 하미(哈密)를 출발해서 투루판(吐魯番)으로 이동하는 길은 어제 보다 훨씬 수월하고 다채로웠다.
여기서 부터는 해발 고도가 -150m로 내려가, 여름 날씨처럼 더웠다. 그러니 우루무치보다 봄이 한 달 먼저 오는 게 아닐까?
가는 길에는 풍성한 오아시스 마을이 보였다.
천산 산맥의 만년설을 이용해서 지하 수로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이 수로는 3,500년 전인 수나라 시대부터 만들어 졌으며, 아직도 5,000m정도는 그때 그 수로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일도 만리장성에 이어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목적지 '마귀 성'으로 가는 길은 양 옆으로 농지가 있고, 농사짓는 농부를 볼 수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농지엔 목화밭이 꼭 함박눈이 내린 것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차를 세우고 목화를 직접 만져보고, 또 다래(목화의 익지 않은 어린 열매)를 따보며 밭에 들어가 시진을 찍고 있는데, 주인이 제재를 해서 차를 타고 눈으로만 보았다.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목화밭을 보게 될 줄이야!
끝없이 펼쳐진 목화의 물결을 지나니, 이번엔 대추밭이다. 주렁주렁 매 달린 대추밭 앞에서 차를 멈추고 방풍림으로 심어 놓은 임자 없는 대추밭에 들어가, 자두만한 대추를 따 먹고, 또 가방에 하나 가득 따 담았다. 달콤한 대추를 한 입 물고 오물거리는 대원들의 얼굴이 대추 볼처럼 발갛게 상기 됐다.
이틀간의 지루함이 싹 가시면서, 이제는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어제의 불평은 감사로 변하고, 오길 잘 했다고 입을 모은다.
사막이니까, 좀 지루해도 참고 기다리면,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먼 길은 갈 수 있다는 각오를 세우는 계기가 됐다.
마귀성에 도착해서는 거대한 자연의 힘에 압도 됐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 바다다.
정말 우리가 상상하고 T.V를 통해서 보던 그 모래사막이다. 모래 바람이 여기 저기 모래 무더기를 만들어 놓았고, 또 거기에 마귀성이라는 거대한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성문도 흙으로 특이하게 만들어져 있었으며, 성안으로 들어 갈수록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모래가 쌓인 것이 오랜 세월 굳어져 이젠 돌이 된 것이다. 오채성과는 또 다른 자연의 작품을 본다.
더욱 더 큰 규모이고, 오채성과는 다른 자연 현상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던가!
마귀 성(密雅丹)이라는 이름은 바람이 불면 귀신 소리가 나서 붙인 이름이란다.
이 거대한 바위산은 풀 한포기의 생명체도 용납하지 않았지만, 그 거대함이 그 경이로움이, 멋스러워 보이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나도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과 동화 작용이 일어난 것인가?
또 곳곳에는 그 유명하기로 이름 난 투루판 포도 농장이 그 명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투루판 포도는 천산 산맥의 수로를 통해 공급되는 맑은 물과 충분한 일조량 때문에 당도가 높고, 맛과 영양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가이드가 건네는 건포도 간식을 먹으며 지루함을 달랬다.
이 건포도는 나무에서 바로 말린단다. 포도 결실기에 수로의 물 공급만 끊으면 포도의 수분을 나무가 빨아들여 제 살 궁리를 하기 때문에 나무에서 자연 건조가 된다고 한다.
창밖으로 펼쳐진 농지에는 갖가지의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옥수수, 고추, 해바라기 등의 농작물도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런 삭막한 사막에서도 물이 공급되니, 더 없이 풍성한 들판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는 길에 회황(回皇)무덤을 관람했는데, 입장료가 단체의 경우도 1인 40위안이라 적잖은 돈이다.
이 곳은 회교 국가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곳곳에 회교 사원이 있고, 꼭대기엔 초승달 모양의 로고와 정면엔 청진(淸眞)이라는 글자가 어김없이 새겨져 있었다. 황족의 무덤은 내부에 땅을 깊이 파고 매장한 후에, 석회로 위를 긴 네모 모양으로 집처럼 만들어 놓고 위는 비단 천으로 장식해 놓았다. 이런 무덤들이 건물 안에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이 신장 지역의 초원에는 여러 민족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자연 조건이라, 여러 민족들이 부족 국가를 이루었다, 망했다를 거듭한 듯하다.
저녁에는 투루판에 있는 카자흐족 식당에서 가무단과 같이 양고기 바베큐 파티를 즐겼는데, 조 별 장끼 자랑으로 우의를 다지게 됐다. 춤추고 노래 부르는 가운데 현지 가무단과 손잡고 돌면서, 회장님의 선창에 의해서 아리랑을 부른 것이 인상 깊었다. 나중에는 가무단을 포함한 식당 종업원 모두가 손잡고, 우리의 노래 아리랑을 부른 것이다.
아리랑 노래는 대한민국의 혼을 싣고, 투루판을 넘어 이 사막 곳곳에 울려 퍼질 것이다.
투루판 카이보오 호텔(凱博酒店)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투루판 카이보오 호텔(凱博酒店)에서 8시20분에 출발하여 이번 답사의 하이라이트인 나라티(那拉提)로 향했는데, 호텔 식사 예약이 7시 반인 데도 식사 준비가 미처 되지 않았고, 음식량도 턱없이 부족해 난민 수용소에서 음식을 타 먹으려 죽 줄을 서는 꼴이 벌어졌다.
줄을 서도 워낙 적은 양이라 먹을 게 없어 겨우 빵 하나 먹었고, 늦게 온 사람은 그것마저 없었다.
이렇게 밥을 못 먹는 경험도 나중에 생각하면 좋은 여행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총무와 가이드가 만두와 물을 나눠 줘서 배고픈 차에 맛있게 먹었다. 사막지방에서 비상시에 먹었던 낭(囊)이라는 이 지역 빵과, 이 지역 과일인 하미과와 수박까지 곁들어서 맛있게 먹었다. 꼭 관광버스 타고 가다, 휴게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밥 먹던 모습과 흡사했다
오늘 일정은 천산 산맥을 넘어, 나라티로 가는 가장 긴 여정이다. 그러니 하루 종일 차를 탄다고 생각하면 된다.
점심 때 반면(拌面)이라는 비빔 면 18위안짜리를 점심으로 먹고, 근처 가게에서 20위안 어치 비스킷을 사서 나눠 먹었다.
오늘은 이동하는 중에 진짜 초원다운 초원을 보았다.
가까이에는 푸른 초원이, 멀리는 기묘하게 생긴 돌산이, 조화를 이루었다. 거기다가 풀 뜯는 양떼도 더러더러 보였다.
투루판은 천산이 가까우니 모처럼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볼 수 있었다.
창 밖에는 초원과 농지가 연달아 나와서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고추를 말리는 모습, 그리고 옥수수를 말리는 모습이 들판의 농부와 잘 어울렸다. 비오지 않는 지역이라 이 곳 고추는 저절로 태양초가 되고, 자연 건조 옥수수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자연 건조가 얼마나 어렵기에 태양초라면 돈을 훨씬 더 주고 있지 않는가?. 그래도 진짜 태양초는 없다고 한다. 이 곳 사람이 들으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풀 한포기 없는 산들에 둘러싸인 이곳 사람들은 산불 나는 모습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란다. 참.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도 극과 극의 환경인 곳이 많으니, 자연의 조화가 참으로 신비롭다.
이 곳은 흉노족을 선두로 선비족, 거란족, 말갈족, 등의 유목 민족들이 지배를 거듭했었는데, 징기스칸이 통일하게 되었다.
가는 길에 황묘(黃廟)라는 라마교(티벳불교) 사원을 관람했다. 우리나라 사찰의 울긋불긋한 단청과는 달리 노란색(황금색)을 주로 사용하여, 건물이며 시설물 등에 특색을 주었다. 이 사원은 몽고족의 후예가 세운 사원이라고 한다.
노란색 종을 죽 줄을 세워 매달아 놓고, 사람들이 그 종들을 빙글빙글 차례로 돌리며 소원을 빈다고 한다.
가는 길에는 곳곳에 유목민들의 거주지가 보이고, 양떼를 몰고 가는 양치기 아저씨 아줌마들이 보였다. 양떼가 도로를 점령하고, 빽빽이 줄을 서서 걸어가는 모습도 장관이다. 종종 걸음으로 가는 양떼들이 어린아이처럼 귀엽다. 차가 가도 겁내지 않고 앞만 보고 졸졸 걸어가니 순한 양이라고 하나보다.
혜초스님이나 삼장법사(현장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이라 뜻 깊은 걸음이지만, 아침 8시에 출발한 차가 다음날 0시30분에 도착해서 저녁 먹고 새벽 1시에 호텔에 도착했으니,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호텔은 시설이 최악이라 수건도 없고, 욕실도 이상하게 넓기만 하고 온수도 잘 나오지 않았다. 보일러는 아예 작동도 되지 않는다.
나라티(那拉齊)호텔 이름이 全球通度假村이다. 이 호텔은 나라티 풍경구 안에 있어 개발이 제한 되기 때문에 옛날의 낡은 시설 그대로 인 것 같다.
오늘은 나라티 공중초원(空中草原)에서 오전을 보내는 일정이라, 어제의 피로를 초원에서 풀 수 있었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풍경구가 있었는데, 이곳은 해발 고도가 2,000m를 넘어 겨울 날씨 같아 지금까지 입지 못하고 가방 구석에 쳐 박혀 있던 겨울옷을 꺼내 입고, 그것도 모자라 내의도 입었다.
전용차로 해발 고도 2200m의 초원에 오르게 됐다.
이 곳은 천산 산맥의 일부인데, 나라티라는 이름은 징기스칸 지배 당시 서역 정벌 후 아들에게 이 곳 정벌을 명령했는데, 이곳을 정벌하고 보니, 딴 세상에 온 것 같아 몽골어로 '딴 세상에 온 것같이 처음으로 해를 보다.' 라는 뜻의 '나라티'가 이름이 됐단다.
이 초원의 크기는 축구장 크기의 2500배이며 산 밑은 해발 1800m이나 평균 높이는2200m이며, 6.7월이 목축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며, 이때는 높이 올라가 양을 치다가, 가을이 오면 점점 내려오며 겨울에는 하산 한단다.
중국아가씨 '펑 이아 지에(馮亞杰)'의 설명을 김정길 가이드가 통역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산 중턱엔 사과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가장 먼저 사과가 나온 곳이라고 하며, 5월엔 사과 꽃이 만발하여 이 초원이 꽃동산이 된단다.
주의 점은 몽고 빠오(게르)에 함부로 들어가 사진을 찍거나 흘끔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혹시 사냥개가 물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천국에 온 기분이다.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 눈에 보이는 푸른 초원과 풀뜯는 양떼와 말떼들 그리고 멀리 천산 산맥엔 만년설을 하얗게 이고 있는 설산이 보인다. 이보다 더 좋은 풍경이 어디 있을까?
점심 후 이리(伊犁),또는 이닝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동하게 됐는데, 창밖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양떼가 풀 뜯는 오아시스 도시는 한편의 그림이었다.
이닝은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관문이라 오아시스 도시 중 가장 발달한 도시다.
이닝에 도착해서는 꽃과 수목이 우거진 멋진 식당에서 식사한 후, 모처럼 이른 시간이라 우리 1조는 7명이(몸이 피곤한 자4명 제외) 시내를 관광했는데, 백화점 앞 광장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자연스럽게 춤추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 광경은 공원이나 광장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양에서 서양을 보는 듯하다. 이 문화는 우리의 폐쇄적인 문화보다 고급스러워 보였다.
우리들의 춤 문화는 관광버스에서 술 마시고, 띵가띵가 하는 문화가 아닌가! 늦은 시간인데도(11시) 양꼬치와 술을 사서 숙소에 돌아와 먹고 마시며 우의를 다지고 12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왔다.
이리 시는 인구 50만으로 위그루 족, 한 족, 카자흐 족, 회족, 몽고족이 살고, 아리 강 건너에는 세비 족, 러시아족이 살고 있다. 이러니 이 도시는 종족 전시장 같다. 현재는 신장 지역의 중심도시가 이리에서 우루무치로 옮겨 가게 되었다..
9시 조금 넘어 청나라의 고성인 혜원 성을 방문했는데, 9시30분에 도착하니, 성문이 열리지 않았고,(10시에 문이 열림) 이닝 시는 처음엔 청나라 수도 였다고 한다. 청나라 때 비로소 이 신장 지구를 통일했었기 때문이다..
이 혜원 고성은 청의 건륭황제 때 건설한 성인데, 순위제 때는 수도를 이닝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신장지역 성도도 원래는 이리였으나, 모택동 때 우루무치로 옮겼다.
한 시간 이동하여 카자흐스탄과의 국경지대인 훠얼궈스(藿爾果斯)로 이동해서, 카자흐스탄을 멀리 바라보면서 소핑센터에 들러 쇼핑했는데, 어떤 회원은 라벤다 베개를, 또 어떤 회원은 손자 옷을 샀다. 노점에서 팔고 있는 사과와 복숭아는 아삭아삭한 게 너무 맛있었다. 가이드와 총무가 단체로 사서 나눠 줬다.
과일 계곡(果子溝)로 가는 길엔 모처럼 산에 나무가 빽빽하여 딴 세상에 온 듯하다.
쪽쪽 뻗은 나무가 삼나무 같이 보인다. 잔가지 없이 대나무처럼 위로만 뻗었다.
나무가 없는 산엔 초원이 이루어졌고, 양떼와 말떼가 풀을 뜯고, 사이사이 목화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 과일 계곡은 초원 실크로드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그 길이는 28Km며 계곡을 따라 오르면 해발 2071m의 산 위에 넓은 호수가 있다. 둘레가 453Km 수심이 46m의 거대한 호수다.
호숫가에는 카자흐족 마부가 말을 모델로 삼아, 돈을 벌려고 애쓰고 있기에 20위안을 1달러로 흥정해서 몇 명이 말을 타고 사진을 찍었다.
저녁은 규톤(奎屯)으로 돌아와 우루무치 여행사 사장의 저녁 식사 제공으로 제대로 된 양고기 샤브샤브를 먹게 됐다.
내일을 기다리며 잠을 청했다.
규톤은 병단(兵團)도시라 한족만 거주하는 도시로 계획도시이다. 정부에서 한족 출신으로 병단을 모집해서 집단으로 이주 시켰기 때문에 농사를 짓든 다른 일을 하든 국가에서 월급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도시는 질서가 있고, 생활도 여유로웠다.
규톤을 출발하여 12시 쯤 우루무치에 도착해서 정부에서 관리하는 옥(玉) 전시장으로 갔는데, 중국 사람들은 옥을 좋아한단다. 옥은 행운을 주고, 기(氣)를 준다하여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데, 특히 곤륜산 옥을 최고로 친다.
또 호탄옥은 개울에 있는 원석을 주워서 가공을 하는데, 이 옥은 주로 백옥이다.
곤륜산 옥 중 경옥은 비취색이 나고, 강도가 높으며 연옥은 주로 백옥이다.
다음으로 우루무치 민속 박물관에 갔었는데, 각 부족들의 의상과 생활 도구 등이 전시돼 있었고, 색다른 점은 미이라가 다수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오래 된 미이라는 3500년이나 됐단다.
사막 지역에서는 사람이 지쳐 쓰러지면 그대로 쓰러져 죽고, 죽은 후엔 빠르게 건조가 일어나, 돌처럼 굳어지게 되는데, 첫 날 나무가 돌처럼 굳어 화석이 된 이치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다음은 전통을 자랑하는 '바자르'시장에서 쇼핑을 했는데, 에누리도 많이 하고, 여러 물건들이 다양하게 있어, 이 지방의 풍물을 체험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에누리는 50%에서 잘 하면 70%도 할 수 있었다. 밀고 당기고, 흥정하는 재미도 쏠쏠했고, 나의 중국어 실력도 발휘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 됐다.
상인들은 주로 소수 민족들이고, 한 족 상인보다는 순진해 보였다.
모두들 손자 손녀들의 장난감을 사려 해서 내가 중간에서 흥정을 했더니, 중국인인 줄알고 '말하지 말라는 둥, 가버리라는 둥' 하면서 경계했다. 그렇다면 나의 중국어가 조금은 먹힌다는 말이 된다.
같이 간 일행 중에 장식품과 장난감을 흥정해서 사고, 또 다른 가게에서 물건을 사려는데, 갑자기 먼저 산 가게 남자가 오더니, 값을 치르지 않았다고 물건을 뺏어 가 버렸다. 돈을 지불한 영수증이 없으니, 증명할 길이 없어 30위안을 뺏기고 말았다. 나중에 그 회원이 생각해 낸 것은, 물건은 자기가 사고, 돈은 남편이 치렀다는 것이다. 아마 거기서 착각이 일어났나 보다.
마지막 코스로 발 맛사지를 받았는데, 대부분이 한 족이고 20대의 어린 나이에 결혼한 사람들이다. 기술은 괜찮은 편이나, 자기네끼리 시끄럽게 떠드는 게 흠이다.
3500Km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둥글게 한 바퀴 돌아오는 코스였는데, 모든 회원들이 잘 견뎌냈고, 힘든 버스 타기도 오로지 그 옛날 사막을 통과해서 비단을 전하던 상인의 심정으로, 구도자의 심정으로, 힘든 여정을 잘 소화해 낸 것이다.
새벽 1시20분 우루무치 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은 8일간의 대 장정을 마친 우리들을 고국의 품에 안겨 주었다.
고비 사막에서
죽을 고비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나는 들풀이여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의 뒤안길에
헤치고 헤치면서 타박타박 걸어가던
낙타의 울음따라 피어오르던 들풀이여
오늘도 목마른 내 영혼 여기 있었네
바람 부는 황량한 들판에서
세월이 흘러가면 모래도 돌이 되고
나무도 돌이 되고
모두가 돌이 된다.
박물관에 누워 있는 미라도
단단한 돌이 되어
고비 사막의 바람을 흔들고 있는가
사는 길이 어렵다고 느껴질 때
고비 사막에 가 보아라.
혜초가 걷던 길을 걸어 가 보아라.
막막한 가슴을 파고드는 어둠을 따라가면
내 마음의 오아시스가 그대를 찾아 올 지니
죽을 고비에 돋아나는 풀빛 바람
새벽별도 모래밭에서 발을 묻는다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주 뉴질랜드를 찾아서 (0) | 2014.04.11 |
---|---|
포항에서 (0) | 2014.03.28 |
김문억시인의 사설가락 갓끈 떨어지고 턱 빠지고 (0) | 2013.06.03 |
대만 야류 해변에서 (0) | 2013.03.21 |
꺼지지 않는 활화산 일본을 다녀와서 (0) | 2013.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