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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돌石)과 시(詩) 그리고 모국어의 만남이 있는 보령을 찾아서

<문학기행>

)과 시() 그리고 모국어의 만남이 있는 보령을 찾아서

김전

 

장작을 도끼로 내리찍듯 찍어대는 태양의 뜨거움이 사정없이 퍼부었다.

725일 김해의 박희익 시인이 1시간 후엔 대구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만나고자 하는 장소는 칠곡 문화예술회관 정확하게 10시에 도착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반가웠다. 만나고 싶은 사람 뜻이 통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만나기만 하면 뜨거운 전기가 흐르듯 짜릿하기만 하였다.

여행은 어느 곳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번에는 더 실감나게 하였다?

경부선을 타고 두 사람은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향하여 달렸다.

언제나 길은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손짓하고 있었다.

길은 길대로 언제나 길게 누워 오는 이, 가는 이의 마음을 훑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풍령 고개를 넘어 우리들은 김밥과 우동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한 후 서산 천안 역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오후 1시 쯤 도착하였다, 뜨거움을 피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살피다가 호수공원을 찾기로 하였다. 다리 밑에서 쉬고 있는 사람에게 물으니 우리가 도착한 이 곳 모두가 공원이라고 하였다.

공원 속에 정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망초가 팜콘을 뿌려놓은 듯 하늘거리고 하늘엔 목화송이를 뿌려놓은 듯 뭉게 구름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호수를 보니 떠 오르는 시가 있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정지용 (호수 전문)

 

보고 싶은 얼굴 윤지훈(세계문인협회 사무총장) 정선교( 소설가,문학세계 문인회 회장)

최병영(시인,수필가)이 떠 올랐다. 서울역에서 정선교기사가 점심을 먹고 가자고 하여 아직 서울역이란다. 기차를 운전할 기사는 소설가 정선교인가 보다. 문인들은 이렇게 과장법과 비유를 잘하여 잘 웃기곤 한다.

시도 때도 없이 기차는 길게 늘어놓은 지렁이처럼 꼬리를 감추고 철길 위로 미끄러지듯 흘러가고 있었다. 바람도 흥이 나는 듯 개망초 꽃을 흔들어 놓고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듯 우리들도 흐르고 있었다. 강물도 산들도 흐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흰구름도 흐르고 있었다. 세상에 흐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오후 5시경 윤지훈 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리가 아파1층으로 내려가지 못하니 2층 택시 승강장으로 오라고 하였다

우리는 네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2층 청사로 올라갔다. 거기엔 만나고 싶은 사람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뒷좌석에 세 사람을 태우고 우리는 충남 당진을 향하여 달렸다. 삽교천을 지나고 삽교호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도착하니 정재출 시인이 기다리는 곳은 바다조개구이 집이었다. 정재출 시인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재출 시인은 신인상 시상식 때 내가 상을 준 사람이었다. 정시인은 경북 성주가 고향이고 대구에서 자랐다고 한다. 내가 대구에서 왔다고 하니 더욱 더 정감이 갔다.

정재출 시인은 감각적인 시인이다.

 

 

어릴 적 한 여름밤의 해질 무렵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쑥 향의 모깃불에 쫓겨

방으로 들어온 모기들이 누렇게 빛바랜 벽지에 앉아

쏟아낸 분비물이 그려놓은 누런 신문지(新聞紙)의 글들.

 

방안 가득한 전등불의 보호색으로 위장한

모기들의 분비물 흔적들이

어떤 때는 꽃으로, 어떤 때는 팔방 연속무늬 사이사이에

진한 피 냄새가 난다.

 

그 옛날,

어머니께서

형들의 피와 누님들의 피와 아버지의 피를

물고 나르던 모기들이 어머니의 손바닥에 맞아터진

모기들의 선혈(鮮血)들이 호롱불 비치는 벽에 살아남은 흔적이

형광 빛으로 반짝인다.

 

콘셋에 꽂혀있는 전자(電子) 모기향의 진한 냄새가

어린 날의 기억을 따라 춤을 추고 있다.

 

그 뒤를 따라 어머니의 땀 냄새가

나의 콧잔등을 타고 지나간다.

 

정재출 <감골 이야기4> 전문

  우리 일행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조개구이 집에서 조개구이와 회를 맛있게 먹었다.

우리는 모텔을 찾아 피곤한 심신을 눕히고 싶었다. 그러나 주당들은 소주를 다 비우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러나 코고는 사람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태풍 경보 싸이렌이 우리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덜커덩 거리며 달려오는 바람소리는 객창감을 몰고 오고 있었다.

모두들 꿈나라에 갔지만 박희익 시인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면서 잠 못이루는 것 같았다. 피곤한 자에게는 길이 멀고 잠 안 오는 자에겐 밤이 길다는 말이 울컥울컥 솟아오른다.

이튿날 우리는 뺀데기 메운탕 집을 찾아 해장을 하면서 아침을 먹었다. 바닷가 내음이 물씬 나는 식당은 바다를 끌고 와서 우리의 식단 위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메운탕이 모자란다고 하니 한 냄비 더 리필해 주었다.

보령의 넉넉한 인심이 살아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우리는 너무나 맛이게 잘 먹었다.

정선교회장은 아침 대신에 소주를 먹겠다고 하였다. 언제나 소주 잔 속에서 한세상을 울거 내고 있는 그의 소설은 항상 새로움을 더해 주고 있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늘빛 조형박물관을 찾기로 하였다.

가는 길에 추사 김정희 고택이란 이정표가 있었다. 우리의 발길은 그 길로 달리고 말았다.

추사고택은 어마어마 하였다. 추사선생의 정신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이고 있는 글귀들이

우리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추사 김정희 고택은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간의 전형적인 양반 대갓집이다.

추사는 형조참판까지 올라갔으나 당쟁에 몰려 제주도까지 유배간 파란만장한 삶의 모습이 동영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예산의 백송을 찾기 위해 백송조각공원에 들렸다. 하얀 소나무 백송은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백송은 백의민족을 상징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심응섭 교수가 운영하고 있는 늘빛 조형박물관로 향하였다.

우리 모국어를 형상화 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만들었다는 조형박물관 우리글을 사랑하는 그의 애국심이 곳곳에서 무궁화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심 교수는 행정학과를 전공했으나 모국어를 사랑하는 뜻에서 박물관을 세웠단다.

우리 한글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상상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보령 곳곳 마다 심교수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 심 교수는 우리 일행을 데리고 수덕사 앞에 있는 맛있는 점심을 먹게 하였다. 만남과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일까?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심교수의 따스한 인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보령은 돌()의 고장이다. 그래서 돌을 다듬어서 시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이기 위하여 서해 예석을 구겨하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돌들을 두드리고 갈고 갈아 돌()이 새로운 사물로 태어나는 순간을 보았다..

죽은 자의 육체를 살리는 석공들의 장인정신 그리고 그 속에 영혼을 불어 넣는 시인들, 이들은 생명력을 탄생시키는 조물주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그리고 이양우 시인이 운영하는 시비공원을 관람하였다. 여기저기 풀들이 시비를 가리고 있어

안타깝기도 하였다. 훌륭한 시인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있다는 데 의미가 매우 컸다.

서해 예석에서 전시해 놓은 전시장 여러 곳을 둘러보고 저녁 식사를 대접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보령의 이명희 시인이 우리를 기다린다기에 우리는 함께 만나기로 하였다.

저녁 식사는 보령 댐에서 잡히는 쏘가리 회와 쏘가리탕을 먹었다.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하였던 쏘가리 회는 쫄깃쫄깃하여 소주의 맛을 더해 주었다.

특히 서해예석() 대표이신 류미순의 걸걸한 모습은 우리를 압도 하였다.

그리고 보령의 입맛을 제공한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우리는 늦었지만 보령의 명물 개화예술공원을 찾기로 하였다. 여기에도 한국을 빛낸 시인들의 시비가 빼곡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음악가들의 노래비도 우뚝우뚝 솟아 흘러간 노래들이 들려오는 듯 하였다.

밤이 깊어 내일 아침에 둘러보기로 하고 우리는 개화예술공원 안에 있는 찜질방에서 여장을 풀기로 하였다.

넓다란 찜질방엔 우리 다섯 사람이 차지하였다. 짐질방 사장은 퇴근하면서 우리보고 오는 손님을 받으라 하고 가벼렸다.

이명희 시인은 여기까지 우리들을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학 이야기를 나누고 이명희 시낭송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시는 영혼의 울림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은 시낭송가라고 본다. 시의 보급화를 위하여 시낭송이 더욱 확산되었으면 한다.

밤이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는 데 노년의 부부가 찾아왔다.

이명희 시인이 종업원이 되고 정선교 소설가를 사장이라고 소개 하였다. 그것 까지는 좋았는 데 찾아온 노년의 남자는 술 한 잔을 걸치고 와서 환경이 나쁘다고 시비를 걸어왔다. 이 때는 사장이 나서야 한다고 우리들은 말하였다. 하룻밤에 사장이 된 정선교사장은 오늘 인수 인계를 하는 중에 수리를 못하여 미비한 점이 많아 죄송하다고 사정 하였다.

술 취한 손님은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면서 소리 지르며, 시비를 걸고 우리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돈을 돌려주면서 나가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술 취한 이 사람은 우리에게 민주화 투사니 하면서 자기 자랑을 하고 또 시비를 걸었다. 우리는 오늘 잠자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걱정이 되었다.

파도도 바람이 지나가면 조용해지듯 밤이 깊어지니 조용해 졌다. 두 부부인지 애인이지 모르나 두 사람은 한쪽 구석에서 꿈나라로 가버렸다.

오늘은 코 고는 사람을 피해 멀리 떨어져서 자야겟다고 생각했다. 아침이 되자 추웠다. 샤워장에서 어제 그 사람을 만났다. 어제 져녁에 그 사람이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억이 없다고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기억에 없다고 하면 모든 게 변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정선교사장님께 죄송하다고 말씀 전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도 손님이라고 하니 할 말이 없는 듯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아침에 우리들은 시비들을 읽어면서 개화예술공원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연꽃으로 뒤덮인 호수 그리고 토기들이 뛰노는 모습 그리고 사슴 또 고니들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음악당, 미술관, 삼국지 체험장, 허브 식물원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물 속엔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5만평이나 되는 개화예술공원은 볼거리가 너무 많아 하루를 잡아야만 둘러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 식사는 하는 곳이 없어 배고픔을 참으면서 석탄박물관으로 갔다.

삶을 위하여 목숨 걸었던 석공들의 눈물이 진하게 베어나고 있었다. 두더지처럼 깊은 땅을

파내어 아픔까지 묻어야 했던 석공들의 삶,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바람굴로 갔다.

굴 속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우리의 몸을 식혔다.

우리는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보령시내로 나왔다. 시장이 반찬이라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고 나와서 대천해수욕장을 찾았다. 수많은 인파들이 바닷물에서 꽃송이 되어 연꽃처럼 둥둥 떠 있었다. 시원한 소나무 밑에서 캔 맥주를 마시면서 시원한 바다도 함께 마시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우리의 꿈을 날려 보내면서 우리는 귀향길에 올랐다.

대천 고속 버스터미녈에 세 사람을 보내고 우리는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5분이 채 떠나가 전에 윤지훈사무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차표가 매진되어 갈 수 없으니 다시 돌아 오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시 고속버스 터미널로 돌아갔다. 개 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다시 대천역으로 향하였다. 마침 대천역에서는 차표를 구할 수 있다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이별의 인사를 하고 대구를 향하여 차를 달렸다.

대전을 거쳐 대구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3일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문우들과의 만남은 만날수록 보고 싶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던 기행이었다.

보령은 돌()과 시의 고향이다. 그리고 모국어를 사랑하는 심응섭 교수의 늘빛 조형박물관은 한결 값진 것이라 생각하였다.

다사한번 우리를 초청해준 정재출 시인 그리고 심응섭 교수님께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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