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속에서도 영원을 꿈꾸는 진시황이 있었네
(중국 당나라의 수도 서안)
김전(시인. 본지 편집위원)
나이가 들면 1/3은 여행, 1/3은 글쓰기 1/3은 글 읽기를 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살고 싶어 달려온 길,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건강을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재능까지 주셔서 앞으로도 그렇게 달려가고 싶다.
이번에는 대구대학교 사회지도자 과정에서 유서 깊은 서안으로 가게 됐다.
여행은 떠날 때부터 설렘과 기다림으로 행복에 젖곤 한다.
17명의 회원들의 얼굴엔 함박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생의 삶 자체가 여행인데 지금까지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던 우리 회원들은 햇살처럼 따스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5월26일 대구에서 김해공항으로 저녁6시에 출발하였다.
여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어디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느끼곤 한다. 이번에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가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친구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다 보니 대구에서 김해공항까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했다.
김해 공항에서 수속 절차를 마치고 서안으로 향하는 에어부산 비행기는 밤9시 45분에 이륙하여 고도를 높이며 서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서한 공항까지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밤늦게 도착한 우리들은 가이드와 미팅하여 ‘중국 군안왕조’호텔로 향했다. 호텔까지는 40분이 소요됐다.
중국의 밤은 거대한 용들이 꿈틀거리듯이 생동감으로 다가왔다.
이번 여행은 다섯 번째의 중국 여행이다. 중국에 여러 번 갔지만 갈수록 친근감이 있고 우리와 정신적으로 통하는 점이 많아 중국을 좋아하게 되었다
중국의 모습은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가 바쁘게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이 우리들에게 무서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군안왕조 호텔은 거대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밤늦게 도착한 우리들은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이국에서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은 오지 않고 지나간 잡념들이 오롯이 떠오르며 고개를 들고 있어 이리저리 뒹굴다가 새벽을 맞게 되었다..
이틀째 되는 날은 느긋하게 9시까지 아침식사를 하고 10시에 양귀비가 노닐던 화청지로 갔다. 아름다운 호수와 아름다운 산세가 학이 나래를 펴듯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화청지는 동쪽으로 30km 떨어진 임동구 여산에 있었다.
화청지는 목욕하기 좋은 43도의 온천수가 풍부하여 주나라 때부터 이어온 온천 휴양지로 유명하다.
당 현종황제가 아들 수왕의 아내를 빼앗아 18번째 왕비로 맞아 사랑을 나눈 곳이다. 결혼한 여자는 절에 가면 모든 관계가 끊어진다는 구실을 만들어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를 끊고 아들에게는 효경 공부를 시켜 왕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가이드의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당 현종의 나이는 61세 양귀비는 27살이었다고 한다. 양귀비는 젊은 안록산과 밀애를 즐기곤 하였다. 그러다가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당 현종은 사천성으로 피신을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양귀비 4촌 오빠가 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에 창으로 찔러 죽여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안록산. 그의 속마음엔 양귀비의 사랑이 더 크지 않았을까?
그것도 모르고 당 현종은 사랑에 눈이 어두워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양귀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당 현종은 아들 30명 딸 29명을 낳았다고 한다.
궁 안에 있는 궁녀들은 2년 동안 임금의 부름을 받지 못하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계율이 있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던 간에 안록산의 난이 10년 동안 계속되면서 당나라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랑과 권력의 기로에서 살아가는 양귀비의 사랑,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욕정에 눈이 어두운 당 현종, 안록산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서안 화청 온천장에 가서 야외 온천을 했다. 수영복을 입고 온천장에 뛰어들었다. 38곳의 웅덩이마다 물의 온도가 달라 이 곳 저 곳으로 이동하면서 온천 체험을 했다.
남녀가 함께 하도록 되어 있는 데도 우리들은 어색하여 남 녀 각각 따로 온천욕을 즐겼다.. 그 때 여자 한 사람이 그 쪽으로 오라고 하였지만 남자들은 아무도 가지 않았다.
용기 없는 남자들은 그저 덤덤한 생각으로 무표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화청지에서 밤에는 ‘장한가’의 공연이 있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을 듣고 모두가 공연을 보기로 했다.
거대한 산과 호수를 배경으로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그리고 안록산이 난을 일으킨다는 스토리의 공연이 있었다. 호수에서 무대가 올라오는 연출은 정말로 신기했다.
이 공연의 입장료는 5만5천원이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하늘에 달과 별을 달아놓고 산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찬란한 무대, 현란한 조명 등은 오랫동안 나의 가슴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양귀비와 당 현종의 무지개 빛 사랑은 우리들을 매혹의 구렁텅이로 넣고 말았다.
중국은 공연문화가 매우 발달하였다고 본다. 지난번에 보았던 송성가무단의 공연도 너무나 광대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무대와 배우들의 화려한 연기력 그리고 조명술은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다음 날 흙으로 구워 만든 병사, 말 등의 모형갱도가 있는 ‘병마용’으로 갔다. 3호관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200년 전에 만들어진 병마용 갱도는 정말 인간의 힘이 이렇게 큰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1호 갱에는 보병 부대로서 장군의 모습을 흙으로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진시황제를 지키고 있었다. 2호 갱에서는 전차부대로 아직 모두 개발되지는 않았다. 3호 갱에는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아직 미개발로 남아 있었다. 진시황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말들이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나의 눈을 멈추게 했다.
1974년 서안 외곽 임동에서 우물을 파기위해 땅을 파던 농부들에 의해 발견 되었는데 이 때 발견된 갱이 4호 갱이다. 4호 갱은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빈 갱도이고 현재는 1호 갱 ,2호 갱, 3호 갱을 발굴해서 일반인에게 관람하도록 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중국 국빈 방문 당시 서안에 처음으로 왔었는데 병마용을 둘러보고 가셨다고 한다.
3천 궁녀를 거느리고 세월 가는 줄 모르던 진시황도 세월 앞에서는 허무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불로초, 불사약 구하기를 ‘서복’에게 명했으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죽어서도 왕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영원을 꿈꾸고 싶었던 진시황을 여기서 볼 수 있었네
그리고 진시황의 무덤을 찾았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산이었다. 거대한 산봉우리 하나가 무덤이라고 하였다. 믿기지 않았으나 거기에서 출토된 진시황의 부장품이 있었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죽어서도 영원을 꿈꾸던 진시황
삼천궁녀들이 꽃처럼 날아와서
늘 세상은 아름다웠네
하루의 무대는
밤이 너무 짧아 울고 싶었다.
불노초 불사약이 어디에 있나
죽어서도 왕이 되어
장군들을 데리고
땅속으로 들어갔네
죽어서도 살아있는
진시황의 목소리가 들려오네
아! 내 사랑이여
갈증난 내 아픔이여
(죽어서도 살아 있는 진시황)
오늘 저녁엔 내가 한국에서 양녀로 삼은 장핑핑 가족이 초대를 한다고 연락이 왔다.
전날에도 핑핑이 과일을 사 들고 호텔까지 찾아와 주었는데 오늘도 저녁에 데리러 온다는 연락이 왔다.
핑핑의 집은 서안에서 멀리 떨어진 ‘난주’에 살고 있다. 여기 서안까지 오려면 6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핑핑은 구미 금오공대 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자주 우리 집에 들리 곤 했다. 그는 중국에서 소프트볼 대표선수로 활약하였고 리더십이 뛰어난 학생이다. 내가 구미옥계중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소프트볼 코치로 임명하여 활동하게 한 인연으로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한국의 아빠라고 부르며 나를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핑핑을 딸로 받아들이게 됐다.
승용차가 와서 나의 친구 승권이, 춘자, 명숙이와 함께 만찬장으로 갔다. 핑핑의 가족은 핑핑의 아빠와 백모, 숙모, 사촌 오빠, 핑핑 동생, 핑핑 사촌동생들이 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의 최고요리들이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핑핑이 우리들의 통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선물을 주었다.
우리들은 중국의 요리를 골고루 먹을 수 있었다. 핑핑의 가족들은 너무나 우애가 있었고 중국의 명문가임을 알 수 있었다. 방송국장. 은행지점장 석유회사 사장들이었다. 밤이 늦어서야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고 택시를 잡아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다.
따스한 마음이 아직도 봄바람처럼 나의 가슴을 흔들고 있다. 중국 사람들과 사귀기는 어려워도 한번 사귀면 무조건 믿는다는 말이 진실로 느껴졌다.
셋째 날 호텔에서 일찍 일어나 중국의 아침 모습을 돌아보며 산책을 하였다. 줄지어 달리고 있는 오토바이를 보니 모두가 헬멧을 쓰지 않고 쌩쌩 달리고 있었다.
신호등이 없는 곳에서 무단횡단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질서한 것 같지만 묘하게 질서가 없는 곳에서도 질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중국의 아침은 활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언젠가 무섭게 다가올 우리의 경쟁자 중국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화산으로 갔다. 화산하면 중국의 오악 중의 하나인 서악으로 산세가 아름답다. 서안시 동쪽으로 120km. 서안과 정주의 중간 화음 시에 위치했으며 해발 2200m이다.
화산은 크고 작은 3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최고봉인 낙안봉은 중화민족 발생지중의 하나이다.
화산은 중국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곳으로 화산을 말할 땐 빼놓을 수 없는 환산 논검이 생각난다.
화산은 바위가 툭툭 불거져 나와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화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북 봉으로 올라가서 북 봉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바위에 앉아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경외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니까 북 봉 정상까지 올라 갈 수 있었다. 거기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중국인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와 어쭙잖은 중국말로 대답을 하였다.
중국에 와서 삼청 산. 황산 등을 보았기 때문에 거기에 비하면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수수한 자태를 뽐내듯 위엄을 들어내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서안에 있는 시장구경을 했다. 거기엔 살기위한 삶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 가면 꼭 들리고 싶은 곳이 재래시장이다 . 여기에도 가지각색의 물건을 내어놓고 호객행위를 하였다. 우리는 꼬치 집에서 양 꼬치를 사 먹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둘러보니 중국의 물건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그런지 사고 싶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나 시장바닥은 삶의 불꽃이 눈(目) 속으로 튀어 오른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시장이 이렇게 호황을 누리고 있다니 정말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경제는 자유주의를 채택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중국의 부자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한다.
넷째 날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판로군 전쟁 기념관으로 갔다. 일본 패망 후 건설된 전쟁기념관은 그 당시를 말하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무궁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어려웠던 시기를 알려 주는 이정표였던가. 일제와 함께 싸웠던 역사의 현장이 그대로 보존 되고 있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가장 완벽한 서안성벽을 보고 걸었다. 그리고 섬서 역사박물관을 관람하고 현장법사가 지었다는 7층 규모의 대안 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11세기 공자 사당의 중심지인 비림 문서 거리를 보았다. 수많은 비석들의 집을 지어 그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소수민족인 회족의 거리를 보았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상상하면서 찬란했던 문화를 더듬어 보았다.
서안 최대의 중심지이자 번화가 종고루 광장을 거닐면서 서안의 역사를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섬서 가무쇼를 보았다. 화려한 조명술 등 생동감 있게 꾸몄으나 장한가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어디에 가나 공연문화가 찬란한 중국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밤이 되어 전신 마사지를 하러 갔다. 가이드가 팁을 계산하여 주었기 때문에 별도로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들어갔다. 마사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남자에게는 여자가 여자에겐 남자가 들어왔다.
여기서 내가 조금 배운 중국말을 실습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사지 하러 온 여자에게 가족을 물어 보았다. 그리고 가족들은 어떤 일에 종사하는지? 그리고 마사지 경력은 어느 정도 되는 지 그리고 어디에 사는 지. 여기에 일본 사람들도 오는지? 등등 기초적인 것을 물어보니 뜻이 통했다.
서로의 소통 그 기쁨이 나를 즐겁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중국말로 차 한 잔 마시고 싶다고 하니 마사지 받는 모두에게 차 한 잔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밤늦은 시간에 서안 공항으로 향하였다.
서안에서 부산에어 편으로 현지시간 밤 2시20분 서한국제공향을 출발하여 부산 국제 공항으로 향하였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진시황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생명의 유한함과 무상함을 떠오르게 한 이번 여행은 많은 것을 알게 하였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을 꺾어다가
화청지에서 사랑을 꽃 피우며
노닐던 그 날이 꿈이었네.
양귀비여 그대도
갈증 난 사랑을 견디다 못해
안록산과 눈이 맞았는가?
화청지에 달이 뜨면
조각배 타고 떠오르는 양귀비여
그대가 뿌리고 간 이슬비가
내 가슴에 빗물로 흐르고 있네.
사랑도 거짓으로 연극을 하는 세상?
권력은 권력을 무너뜨리고
한세상 꿈이었네.
허무의 하룻밤 밤이었네
( 양귀비에게 보내는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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