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정은숙
면도 칼에 베인 가슴
꽃씨 떨군 뜨락 만나
담담히 꽃을 피웠다
계절 꽃 오고 가는
비밀의 문 열리니
정중히 마중하는 눈
먼지 먹은 빛이 굴절되어
허공 사이로 비켜간 오후가
일몰 속에 묻히며
파르르 숨 고르는 시간
관대하게 주어진 하루는
서서히 저물며
겸손한 만끽을 일깨우고 있다
숙명처럼 남겨진 상흔,
시공간 보듬으며 아울러
밤하늘 침묵으로 자리 잡으니
초점 흐려지는 두 눈 사이로
어둠 속 강렬한 섬광 하나
찰나에 스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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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달
인간이 만든,
빛의 세계에 점령당한
대도시 밤하늘에도
달은 떠오르지요
삽시간에 어둠 깔리며
사방의 적막에 익숙하던 달이
소란에 찬 도심의 밤을
흔들림 없이 쪼이고 있어요
제 자리에 있어야 할 별 무리
휘황한 빛들의 광기에 놀라
밤하늘 등져 달아나도
창백한 얼굴 내민 달은
빛살을 길게 늘어뜨려
그늘진 곳을 비집어요
점점 굳어가는 어둠의 표정 속
지친 사람들의 꺾인 마음
위안의 빛으로 어루만져요
상심으로 채워진 가슴속의
상처받은 영혼 한 점
치유의 빛으로 다독이며
자정 넘겨 희미한 골목길
풀린 발 휘청거리며 내딛는
어느 취객의 빈 주머니 속에도
용기의 빛을 채워요
아침을 기다리다 제빛 사위어
이지러진 작은 조각달로 몰락해도
채움의 인고 견디는 도심의 달은
오늘 밤 다시 떠오르지요
빛바랜 이야기
빛바랜 시간 속의 순간들
촉수 낮은 낡은 전구의 깜박임처럼
희미하게 머릿속을 넘나든다
온 동네 소리가 골목으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어느 집 할 것 없이
삶의 풍속들이 다 까발려지던 시절
내장 삐져나온 꽁치처럼
모두가 민낯으로
서로 부대끼며 위로하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겨울이면 더욱 혹독했던 골목
광마다 채운 연탄이
화단 한편에 묻어놓은 김장이
유일한 버팀목이던 시절
삶은 참고 견디는 것이며
시간은 곧 희망이라 여기던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이 때때로 아리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영영 잊힐 이야기,
벌써 빛바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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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정은숙의 작품 ‘세월’ ‘도심의 달’ ‘빛바랜 이야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정은숙이 보내온 세 편의 작품이 모두 수준작이었음을 밝힌다.
시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남다를 뿐 아니라 감각적 묘사를 통해 선명한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행과 행, 연과 연을 유기적으로 구조화 시킨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세월’에서는 관념적 언어를 구체화 시켰다. 구체적 사물인 꽃을 통해 삶의 모습을 제시했다.
마지막 연에서 ‘어둠 속 강렬한 섬광 하나/ 찰나에 스러지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이게 세월이며, 눈 깜짝 할 사이 사라지는 시간이다. 여기서 삶의 허무함을 나타내고 있다.
‘도심의 달’에서 도심의 달을 여러 가지 어려운 삶을 치유하는 모습으로 변용하여 시적 미감을 나타내고 있다. 또 도심의 달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시적화자의 따스함이 묻어 있다.
‘빛바랜 이야기’에서 낯설기 기법으로 시의 멋과 맛을 나타내고 있다. ‘내장 삐져나온 꽁치처럼/모두가 민낯으로’ ‘화단 한편에 묻어놓은 김장이/유일한 버팀목이던 시절’은 구체적 사물을 제시하여 감각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어려웠던 유년의 시절을 묘사하여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정은숙의 작품들은 감각적 묘사를 통해 형상화 시킨 점이 좋았다.
시어를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느껴진다.
앞으로 더욱더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한국문단의 동량이 되길 기원한다.
등단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지 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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